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주로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인 것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기도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느끼고 깨닫고 있는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스스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떠한 특성을 갖고 있는지,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살아간다면 우리들은 항상 돌출된 바윗덩어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게 되고 또 실족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하나님과 잘 연관시키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는 정체감만 분명히 갖고 있어도 그 사람의 삶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슨 생각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항상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생각한다면 엄청난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신을 생각할 때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영혼의 문제에 대해 자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조 받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곧 영적인 존재가 육적인 부분만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내용물은 보지 않고 겉포장만 보고 물건을 사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도 결국은 외모는 변할 수도 있는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내면입니다. 곧 그 영혼이 어떠한가가 그 사람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향기를 드러내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교제를 나누다보면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향취가 있습니다. 그 향취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괴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가끔은 수시로 그 향기가 변하여 그 사람의 진정한 내면을 헷갈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향기가 세상을 아름답게 적시고 향기로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 아는 사람만이 영혼의 아름다운 향기를 위해 노력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으며,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하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고, 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그대로 우리가 이웃에게 또 그러한 것들을 전하며 살아갈 의무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고 살아가고 싶어도 그 마음 가운데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여 생긴 쓴 뿌리가 있다면 그 마음 가운데 악취가 풍겨나게 됩니다. 그러한 쓴 뿌리가, 그러한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악취를 풍기는 요소들은 없앤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그리고 복을 누리기 위한 출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않으려는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신 중심, 세상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중심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꾸 자신과 세상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기적인 욕심이나 악한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고,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다가오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 되어 주시고 푯대가 되시는 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정체성을 찾으며, 그 정체성을 누리고 살아가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적인 배고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영적 갈망의 존재를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적인 어떤 것들로 그 허기진 갈망을 채워 보려 하지만 결코 그런 것들로는 그러한 근본적인 갈망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저 ‘헛되고 헛된’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하나님 밖에서 그러한 갈망을 채워 보려고 많은 시도들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뉴에이지(New Age)의 흐름입니다. 문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그러한 영적 갈망을 채우지 않고 그러한 뉴에이지적 방법으로 갈망을 채우려 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그 하나님 품에서 뭔가를 채움 받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실체를 깨닫지 못하는 공허와 마음의 빈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중심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면서 그 시각은 인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근본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뿌리가 세상인 옛사람의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러한 시도는 달걀로 바위치기일 뿐입니다.
결국 마음의 뿌리를 세상에, 옛사람에 두지 말고 아예 하나님으로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적인 시각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전면 조정을 해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난 산상수훈은 우리의 시각을 전면적으로 재조정하는 나침반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팔복의 개념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과는 완전히 상치된 가히 혁명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물질의 축복이나 형통을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의 개념은 그런데 있지 않고 결국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하는 식으로 우리의 고정 관념을 하나하나 철저하게 부수고 계십니다.
아예 생각의 근본을 바꿔야 우리가 영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복을,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하라”고(요 1:48)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결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은 곧 그 온전함을 향하여 스스로 자신을 단련시키고 쳐서 복종시켜서 그 온전함이라는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푯대를 붙들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푯대를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의 삶 가운데 적용하면서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고, 언어가 되고, 가치관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가치관을, 세상을 보는 시각을 전면 재조정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향기로운 시각을 갖기 위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는 팔복의 교훈을 마음 속에 다져 가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팔복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요, 생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것이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인 법칙은 역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역설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들어 가면 그 사람은 그만큼 완전함을 향하여 또 한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저 말씀에 복종하는 견지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머리 숙이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지금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한 보석이 내 마음의 땅 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보석을 캐내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만 합니다. 특별히 분노나 증오, 미움 같은 쓴 뿌리들이 있다면 그것이 단단한 바위 층을 형성해서 그 보석을 캐내는 데 많은 장애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 정체를 우리가 깨닫고 안다면 몇 배의 땀과 성능 좋은 기계들로 그 장애물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역사를 돕기 위해 성령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엄청난 영적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춮처 : 추부길 목사 (웰빙교회 담임,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