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고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사무엘하 18:31-33)
아버지는 누구인가?
크리스천 시인이었던 남풍 김현승 님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시가 있다. 아버지의 존재, 희생, 사랑,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아버지의 고독과 존재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시이다.
이 시를 해설한 글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바람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집과 같이 말없이 사랑과 근심으로 자식을 돌보고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
가족을 위한 수고와 무거운 삶의 무게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오직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 곧 자식들의 올곧은 성장과 순수를 통해 외로움을 치유하는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우리가 잘 아는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다윗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던 아들이 바로 압살롬이다.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에서도 그만큼 잘 생긴 사람이 없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겠는가? ‘평화의 아버지가 되라’고 지어 준 압살롬이라는 이름답게 그는 용기도 뛰어났고 지략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 그러한 압살롬이 평화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된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다윗은 너무나도 창피해서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면서 도망을 가는데 압살롬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것으로 생각해서 아예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
결국 아버지 다윗도 군대를 정비해 아들의 군대와 싸우게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의 군대는 승리를 하게 되고, 노새를 타고 도망가던 압살롬이 상수리 아래를 지나다가 머리털이 그 나무에 걸려 공중에 매달리게 되고, 이 틈을 타 요압 장군이 찔러 죽인다. 그리고 그 소식을 아버지 다윗에게 전하는 것이 바로 본문의 상황이다.
“임금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임금님께 의로운 판결을 내리시고, 임금님을 대항하여 일어선 모든 원수들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임금님을 해칠 원수가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그 때 다윗은 여전히 아들 걱정을 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나의 어린 자식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가 무슨 상처라도 입지 않았느냐?”
이에 전황을 보고하던 구스 사람이 사실 그대로 대답을 한다.
“임금님을 대항하여 일어서는 모든 원수들은 압살롬과 똑같은 일을 당해야 옳을 것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다윗은 큰 충격을 받는다.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들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다윗왕은 떨면서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통곡을 한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좋았겠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들 압살롬, 비록 엄청난 배신을 했지만 그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 아버지 다윗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생각으로 한다면 압살롬이 죽었다고 보고할 때 ‘잘 됐다’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아버지의 마음은 그러하질 않았다. 비록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가려 했던 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기에 통곡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죽기까지 희생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자식을 키워보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는 마음, 곧 한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무장된 사랑,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인 것이다.
아버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흘렸던 눈물의 또다른 의미는 결국 그 자식을 죽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는 자책감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차라리 내가 왕이 아니었다면 자식을 죽이지 않았을텐데’, ‘차라리 이 왕 자리를 압살롬에게 물려주었더라면’하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자식이 무슨 죄를 지어도 아버지들은 자신의 가슴을 친다. 잘된 것은 자식이 잘 나서이고, 못된 것은 이 부모가 자녀를 잘못 기른 탓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 이것이 또한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초여름이 될 때쯤이면 남극은 해가 뜨지 않는 암흑의 대빙원(大氷原)이다. 바로 이 때를 기다렸다가 펭귄의 암놈은 내륙 깊숙이 들어와 단 하나의 알을 낳는다.
온통 얼음바닥이라 알이 얼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때부터 수놈은 알을 품고 부화될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먹지도 못하고 오직 알을 품고 있는다고 한다. 그동안에 암놈은 먹이를 구하러 바다에 가서 새우 같은 먹이를 잔뜩 뱃속에 저장한 다음, 다시 빙원을 가로질러 되돌아온다.
그때쯤 되면 새끼가 부화되게 되는데 어미 펭귄은 남편 펭귄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새끼 펭귄에게만 뱃속에 저장해 온 양식을 소처럼 되새김질해서 조금씩 먹인다.
한달반 가까이 굶었던 남편 펭귄은 아내 펭귄이 구해 온 음식은 먹을 생각도 못하고 이제 자신도 먹이감을 구하려고 빙원을 가로질러 바다로 나간다.
그렇게 굶었으니 무슨 힘이 있겠는가? 굶주림에 비틀대며 바다를 향해 가는 불쌍한 남편 펭귄은 결국 힘이 빠져 미끄러지고 나뒹굴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만다. 새끼를 향한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본능... 이 역시 아버지였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에 우리의 가슴을 울렸던 ‘가시고기’라는 소설도 바로 그러한 부성애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아내에게 버림받고 백혈병에 걸린 아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결국은 자신의 망막까지도 팔고 간암으로 죽어가게 되는 아버지.
소설의 절정부에서 엄마와 함께 프랑스로 가게 된 아들 다움이는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벤취에 앉아있는 아빠를 보게 된다. 반가움에 달려가는 아들 다움이.
그러나 아빠는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한다. 아빠 얼굴이 안보이니까 좀 더 다가가겠다는 아들의 호소를 외면하는 아빠. 그 아빠의 마음을 읽은 다움이는 이런 말을 한다.
“슬퍼도 울지 않을게요. 그리고 슬플 때는 노래를 부를께요. 남자는 아무 때나 우는 게 아니잖아요”
눈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아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마음. 그 모진 정을 떼어야 그 아들이 편하게 살 것 같아서, 그래야 엄마하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엄마한테 가라고 소리 지르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자식만을 위하는 아버지의 고귀한 희생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비록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면 나의 아버지가 사랑을 표현할 줄도 모르고 그 방법이 서툴렀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지 나를 미워해서도, 나에게 상처주기 위함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바란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분이시기에... 그저 묵묵하고 담담하지만 그 마음 가운데는 뜨거운 불이 담겨있었던 분이시기에 말이다.
출처 : 추부길 목사 (웰빙교회 담임,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소장)